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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 2026-07-12 (modified: 2026-07-22)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원칙에 의한 설계

Bret VictorInventing on principle에서 원칙에 기반하여 발명 또는 창작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만드는 대신, 어떤 원칙을 정해놓고 그 원칙에 부합하는 것을 그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대로 만드는 것이다.

B. Victor는 오랜 세월 창작자를 위한 도구들을 만들며 고민한 끝에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 중인 대상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Creators need an immediate connection to what they’re creating)“라는 원칙에 도달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 원칙으로 그동안 자기가 했던 여러 시도들을 일관되게 설명해낸다.

다른 사람이 세운 원칙의 사례로는 Larry Tesler의 “No mode”를 소개했다. L. Tesler는 자동차 번호판까지 “NOMODES”로 바꿨을 정도로 모드 없는 인터페이스에 진심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원칙이 있을까? 아무거나 만들고 싶은 거 만드는 게 아니라 어떤 원칙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가 나의 원칙일 수 있겠다.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

건축가 Christopher Alexander도시는 나무가 아니다(1965)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반격자 구조이지만 인간이 설계한 인공 도시는 나무 구조라서 삶에 필요한 연결들을 끊어내고, 그 결과로 인간의 삶이 파편화된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트리는 복잡한 사고를 인간의 머리에 담을 때 유용하만, 도시는 트리가 아니다. 도시는 삶을 담는 그릇이다. 트리 구조로 설계된 도시는 면도날로 가득찬 그릇과 같고, 이 그릇에 무엇을 담건 조각날 수 밖에 없다. 도시를 트리로 설계하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조각내게 된다. #

나는 도시 뿐 아니라 많은 게 이렇다고 생각한다.

나무가 아닌 것들

정보 구조는 나무가 아니다

폴더는 기본적으로 나무 구조다. 폴더로 정보를 분류하려고 하면 파편화를 피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인지신경과학인지과학 범주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신경과학 범주에 넣어야 할까. 단일 위계에 의해 분류 기준을 정하는 순간 그 위계에 깔끔하게 속하지 않는 정보들은 파편화되어 흩어진다.

나무 형태의 설계는 행복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논의가 만나서 흥미로운 논의를 생산해낼 가능성을 차단한다. 지나치게 잘게 나뉜 슬랙 채널, 커뮤니티 게시판 등도 마찬가지.

디자인은 나무가 아니다

디자인도 나무가 아니다. 예를 들어 CSS는 의도적으로 나무 구조(DOM tree)를 가로지르기 쉽도록 설계되었으나(selector), 많은 사람들이 이걸 “해결해야할 문제”로 규정하고, 디자인을 컴포넌트 단위로 끊어낸 뒤 디자인이 이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지향한다.

이로 인해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필요한 소통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치워버릴 수 있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잘게 조각내어 컴포넌트 안 구석구석에 미뤄둔다.

소프트웨어 설계는 나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단일한 주요 관심사(보통은 비즈니스 도메인 관련)에 따라 모듈화를 할 경우, 로깅이나 보안과 같은 나머지 관심사들은 시스템 여기저기 분산(scatter)된다. 이를 지배적 분해에 의한 폭정이라고 부른다.

애스펙트 지향 프로그래밍에서는 다차원적 관심사 분리로 이 문제를 완화한다.

정체성은 나무가 아니다

K. W. 크렌쇼우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에서 분석한 판례에서 법원은 흑인 여성들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결합한 독자적인 청구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흑인에 대한 차별” 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인정될 수 있으나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개념은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정체성 또는 사회적 억압 구조를 단일 축의 나무 구조로 분해하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교차성 분석은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심지어 생물학적 나무도 수학적 나무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많은 종의 잎맥은 그물망 모양이고, 가지는 종종 다시 합쳐지며(연리지), 뿌리는 그 자체로 그물망 모양이거나 곰팡이 균사에 의해 개체간, 종간 네트워크를 이룬다.

나무 구조는 깔끔하고 인간의 이해를 돕지만, 세상엔 깔끔하게 떨어지는 나무 구조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이 인식적 편의를 위해 세상을 재단하고 있을 뿐이다.

원칙에 어긋나는 사례를 대하는 태도

이 원칙은 다른 원칙에 비해 더 우월하거나 더 객관적이어서 원칙인게 아니라, 내가 원칙으로 삼기로 정했기 때문에 나에게만 성립하는 주관적 기준에 불과하다.

원칙에 어긋나는 사례를 접했을 때 분노나 우월감을 느끼기 보다는 일단 천천히 관조하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사안에 따라) 흥미로움 또는 호기심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의견 형성을 늦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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